Archive for the 'Understanding Media' Category


오로라 공주 0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지독한 집착으로 받아들여할 것인가? 후자를 주장한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들을 것이 분명하지만, 엄정화와 문성근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복수의 행위들이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는 부모의 동물적 본능에 더욱 근접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 이 둘의 복수 행위들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에서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로라 공주”에서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결국 애통해하는 (어쩌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지라도) 부모가 아니라, 미워하고 증오하며, 결국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따위의 원초적 본능으로 가득 찬 부모의 집착을 그려내려고 한다는 점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come as you are! 0

소통의 문제다. 대화의 단절은 관계에 대한 불신의 싹을 움트게 한다. 뿐만 아니라, “관계에 대한 의심”이라는 출발선의 끝에는 회복할 수 없는 공포만이 서로에게 남게 된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음”만으로도 상대가 갖고 있는 불편한 요소들에 대해서 조차도 함부로 사회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서로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인 것이다. 결국 그 관계에는 서로 “평가할 수 없음”이라는 명제만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나의 몇몇 친구들이 결국 내가 임의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허상이 아니었는가 의심해 본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수학적 함수관계와 닮아있다. 집합 X에서 집합 Y로 혹은 그 역으로 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면, 결국 둘 사이의 관계는 시작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서로를 연결해 주는 어떠한 선도 치역도 공역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관계에 대한 의심”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든 관계의 출발에는 정의역과 공역만이 존재한다. 상대의 치역을 향한 선을 형성하는 것은 관계의 소통에 달려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소통의 매개체는 바로 Kurt Cobain이 외치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친구로서 혹은 오래된 적으로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네가 진정한 나의 친구라면, 선택은 너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너무 늦지는 마라. 진흙탕에 박힌 채로 혹은 표백제에 흠뻑 젖은 채로 와도 좋다. 너의 모습 그대로,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내가 바라는 모습 그대로 와라. 네가 정말 내 친구라면… 맹세컨대 나에겐 절대로 총이 없다.

Come as you are, as you were,
As I want you to be
As a friend, as a friend, as an old enemy.
Take your time, hurry up
The choice is yours, don’t be late.
Take a rest, as a friend, as an old memoria
Memoria Memoria Memoria

Come dowsed in mud, soaked in bleach
As I want you to be
As a trend, as a friend, as an old memoria
Memoria Memoria Memoria

And I swear that I don’t have a gun
No I don’t have a gun
No I don’t have a gun

Memoria Memoria Memoria

Memoria - and I don’t have a gun

And I swear that I don’t have a gun
No I don’t have a gun
No I don’t have a gun
No I don’t have a gun
No I don’t have a gun

Memoria Memoria

Open Water 0

Open Water의 결말은 매우 충격적이다.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끝이야,” “끝난거야” 라고 웅성대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얼마나 헐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져 있고,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 미디어가 뿌려댄 광고속에 관객들이 깊이 빠져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동안 도대체 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언지 알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도 Open Water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주는 공포는 스필버그가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Jaws의 공포에 비하면 실로 엄청나다 (사실 Jaws가 나에게 주었던 공포는 내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jaws는 분명히 상어의 영어적 표현이라고 강력하게 믿었다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영화들이 주는 공포는 실제로 모든 어린이의 꿈과 환상을 한가지 유형으로 복제하고 번식시킨다는데 있다. 또 다른 공포감은 그의 영화들이 끊임없이 강요하는 가족애는 관객들에게 강력한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filmography를 천천히 살펴보거나, 혹은 자신이 보았던 스필버그의 영화를 상기해보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Open Water가 주는 공포는 영화가 끝난 후 살며시 엄습한다. 신중하지 못한 관객은 분명 실망하거나 결말에 허무해 할 수도 있다. 아주 가끔씩 보일듯 말듯 나타나는 상어의 등지느러미나, 붉게 물든 바닷물만이 관객을 공포스럽게 만들지만, 역시 이것은 다른 여타 공포영화나 서스펜스 영화들이 주는 그것과는 견줄수도 없을 만큼 미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pen Water가 주는 공포감은 난공불락의 대자연속에 버려진 인간의 나약함에 있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속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인간 스스로의 실수로 인해 자연속에 묻혀질 수 밖에 없었던 부부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를 발견해야만 한다. 결국 Open Water는 스필버그식 꿈의 공장을 정면으로 엿먹이는 것이며, The Day After Tomorrow와 같은 헐리우드식 영웅주의 영화에 대한 조롱(嘲弄)의 표현임에 틀림없다.

금자씨, 친절한 금자씨! 0

굉장히 안 좋은 버릇이 있다. 하루에도 수번씩 “그러지 마”라고 듣는 나에게, 안 좋은 버릇이야 이것 하나뿐이겠냐마는… 어쨌든 내가 확실히 인지하고 또 인정하는 현재 나의 최대의 적은 내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데 지독하게 인색하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필요없이 일부러 이름을 부르려고 노력은 한다. 그러나 제길! 정신없이 이야기를 할라치면 또 “야”라는 말이 먼저 튀어 나온다.

“야!” 아주 쉽다. 나와 동년배이거나 어리면 “야!” 하나로 모두 끝난다. 가끔 정없이 들리기도 하고 상대방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나 혹은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나 불리움을 받는 사람 모두에게 이름이라는 건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의미있게 만드는 과정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와 그녀의 딸이 이야기하는 장면 중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는 딸에게 “엄마”가 아니라 “금자씨”라고 소개한다.

금자씨! 금자씨! 금자씨!

딸은 여러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금자는 자신의 이름이 명명되는 행위를 통해서 아마도 “엄마”로서 보다는 “이금자”라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딸이 이해해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엄마”로서의 사랑이나 희생보다는 “이금자”라는 여성이 받아왔던 억압이나 폭력을 그녀는 딸에게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부르기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그 누군가의 존재를 인지하고 기꺼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야!”라고 부르는 행위는 폭력이다.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무의식적 억압의 수단이고 표현이다. 내가 아니면 모두 남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의 표출, 즉 symbolic violence임에 틀림없다.

A quote from “Sin City” 0

Power comes from lying.

« Previous PageNext P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