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Understanding Media' Category


성폭력 방지법의 실효논란과 인권문제에 대한 답글 중에서 pt. 1 0

어쨌거나 제 생각은 그래요. 위에 나열된 고문도구들은 다분히 원시적이고 일차원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해결해 보자는 건데. 이러한 고문도구들이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네요. 인권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성폭력범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러한 멍청한 고문도구보다는 차라리 격리 수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개인에게도 있겠지만, 하루종일 사람들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미디어에게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매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온순하거나 자제력을 갖고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미 사회는 미디어의 상업화와 그 커다란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습니다. 미디어가 쏘아대는 빛과 소리들은 사람들을 깊은 함정에 빠뜨리고 다시 그 웅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밧줄을 던져주곤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매체 자체는 병폐인 동시에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입니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거죠.

결국 우리가 이렇게 싸이에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좋게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미디어 자체가 만들어 놓은 덫과 그 덫을 끊어버릴 수 있는 도구를 쥐고 계속 반복적인 행위를 우리는 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틀안에서만 사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미디어의 폭력성을 일깨우지 못 한다면, 위의 논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위에 열거된 고문도구가 인권을 침해한다면, 인간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보이지 않는 미디어의 힘은 인권을 유린한다고 생각합니다.

Originally written at 00:19 AM on March 11, 2006

만족해하는 임금노예가 될 것인가? 0

“North Country”에서 Josey Aimes의 난공불락의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모습이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바로 나 또한 그녀처럼 지극히 주류에서 비껴나가 있는 마이너러티이며, 권력앞에 끝없이 무기력한 억압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에 대한 저항이 불러올 엄청난 파장과 고통이 이미 예견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저항은 더욱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North Country에서)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권력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내가 부여받은 별볼일 없는 특권으로 그 특권마저 박탈당한 자들에게 내가 억압을 가했던 순간들과 일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 자신의 비열함에 대한 모멸감마저 들었다.

다수가 소수에게, 억압하는 자가 억압받는 자에게 가하는 습관화된 폭력에 대해 저항할 수 없음, 혹은 저항하려 하지 않음을 생각해 보면 (North Country의 광산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일상적인 폭력이나,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위협을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불평등, 불합리, 불공평한 처우는 당연시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의 권리와 생존권을 위해서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의 골칫거리도 위협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노사과연≫의 이야기처럼, 투쟁의 목적은 “만족해하는 임금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Josey Aimes의 투쟁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노동절 새벽에 …

구글 두들 0

오랜만에 맘에 드는 Google Doodle이 올라왔다. 1893년 4월 20일. 초현실주의 화가 Joan Miró (1893 - 1983) 의 생일축하 구글로고다.

싸이를 다시 말한다 2

싸이. 많은 불만족스러운 요소들을 배제하고 생각해 보면, 싸이는 일종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도 볼 수 있다. 여러 장애로 인해 야기된 현대인의 소통의 단절을 다시 연결해 줄 수 있게끔 하는 배출구가 될 여지도 있다는 말이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싸이가 온갖 잡담으로 가득찬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분명 이것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관심들이 표출될 수도 있다.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은 소통할 수 없음과 동일하다. 여기에 남긴 글들은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무의미한 동시에 글에 대한 가치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글을 남기고 댓글을 다는 행위는 양자간에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또한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현대인을 둘러 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들 사이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작은 틈새를 열어 줄 수도 있을런지 모른다.

나의 방명록에 남겨진 글들중의 하나를 잠시 살펴 보자.

가: 쌤~~~ 하이~~~ ^^
나: 푸하하. 잘왔어.. 하이…

“가”의 글에 대한 “나”의 댓글은 지독하게 단순한 인사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언어들을 주고 받는 행위 역시 일상의 연속이다. 이것이 바로 삶이다. 삶이 항상 심각할 수도 없고, 일련의 언행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글 자체와 모든 글을 쓰는 행위에 매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무리한 요구이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고 “가”가 부인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가”와 “나”의 사이의 생활에서의 유대감이나 관심이 웹상에서 여전히 연장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준다.

글쓰기는 때로는 심각할 수도 있고, 때로는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의미라는 것이 사람에 따라서나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 매우 주관적이며 또한 유동적이다. 싸이를 온갖 잡담과 알수 없는 인간관계로 뒤엉켜진 매개체로 이해하기 이전에, 소통의 수단으로나 삶의 한 방편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다지 불쾌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싸이가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만 배제하면 말이다.

싸이는… 6

싸이는 삐리리한 여자들만 하는 짓이다. 내 싸이에 글 남긴 사람이 온통 여자라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온통이라고 해야 고작 서너명밖에 안되지만). 물론 여기에 글을 남기신 분들이 반드시 삐리리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삐리리한 여자들의 놀이에서 손을 뗄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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