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해하는 임금노예가 될 것인가?

“North Country”에서 Josey Aimes의 난공불락의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모습이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바로 나 또한 그녀처럼 지극히 주류에서 비껴나가 있는 마이너러티이며, 권력앞에 끝없이 무기력한 억압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에 대한 저항이 불러올 엄청난 파장과 고통이 이미 예견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저항은 더욱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North Country에서)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권력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내가 부여받은 별볼일 없는 특권으로 그 특권마저 박탈당한 자들에게 내가 억압을 가했던 순간들과 일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 자신의 비열함에 대한 모멸감마저 들었다.

다수가 소수에게, 억압하는 자가 억압받는 자에게 가하는 습관화된 폭력에 대해 저항할 수 없음, 혹은 저항하려 하지 않음을 생각해 보면 (North Country의 광산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일상적인 폭력이나,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위협을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불평등, 불합리, 불공평한 처우는 당연시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의 권리와 생존권을 위해서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의 골칫거리도 위협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노사과연≫의 이야기처럼, 투쟁의 목적은 “만족해하는 임금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Josey Aimes의 투쟁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노동절 새벽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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