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씨, 친절한 금자씨!

굉장히 안 좋은 버릇이 있다. 하루에도 수번씩 “그러지 마”라고 듣는 나에게, 안 좋은 버릇이야 이것 하나뿐이겠냐마는… 어쨌든 내가 확실히 인지하고 또 인정하는 현재 나의 최대의 적은 내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데 지독하게 인색하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필요없이 일부러 이름을 부르려고 노력은 한다. 그러나 제길! 정신없이 이야기를 할라치면 또 “야”라는 말이 먼저 튀어 나온다.

“야!” 아주 쉽다. 나와 동년배이거나 어리면 “야!” 하나로 모두 끝난다. 가끔 정없이 들리기도 하고 상대방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나 혹은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나 불리움을 받는 사람 모두에게 이름이라는 건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의미있게 만드는 과정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와 그녀의 딸이 이야기하는 장면 중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는 딸에게 “엄마”가 아니라 “금자씨”라고 소개한다.

금자씨! 금자씨! 금자씨!

딸은 여러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금자는 자신의 이름이 명명되는 행위를 통해서 아마도 “엄마”로서 보다는 “이금자”라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딸이 이해해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엄마”로서의 사랑이나 희생보다는 “이금자”라는 여성이 받아왔던 억압이나 폭력을 그녀는 딸에게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부르기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그 누군가의 존재를 인지하고 기꺼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야!”라고 부르는 행위는 폭력이다.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무의식적 억압의 수단이고 표현이다. 내가 아니면 모두 남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의 표출, 즉 symbolic violence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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